나의 언어를 알아주세요.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를 읽고.
나는 종종, 내 언어를 이해 받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과연 내가 내뱉은 언어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했을까?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왜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 내 의사를 어떻게 하면 정확한 언어로 전달할 수 있을까?
“수고하세요-“
인사말로 흔히 던지는 이 말은, 사실은 웃어른에게는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계속 고생하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예의를 갖춘다고 한 말이 청자에게는 오히려 예의 없는 태도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해.” =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런데 넌, 날 사랑한다면서 왜 다른 사람을 보지? 사실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거지?’
“사랑해.” = ‘널 보고 싶어. 함께 놀러 가고 싶어. 그런데 넌, 날 사랑한다면서 왜 나와 함께 놀러 가고 싶어하지 않지? 사실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야?’
이렇듯 사전에 등재된 합의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해석은 사람에 따라 무궁무진하게달라질 수 있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할 때 늘상 조심스럽다. 내가 전하는 이 언어가 과연 내가 의도한 대로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두려움 때문에 나는 말을 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언어를 고르며, 글을 쓸 때에는 몇 번씩 사전을 뒤적거린다.
독일작가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에 나오는 주인공은 이 합의화된 언어규칙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그의 침대는 사진이 되고, 그의 책상은 양탄자가 되고, 그의 의자는 시계가 되고, 그의 신문은 침대가 되고, … 그러니까 남자는 아침에 사진 속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탄자가 놓인 시계 위에 앉아, 무엇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를 고심한다.
남자는 이 놀이에 푹 빠져서 차츰 원래의 명칭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워지게 된다. 사람들이 이 물건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한참 생각해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을 사람들은 침대라 부르고, 그의 양탄자를 사람들은 책상이라 부른다. 그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타인도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은 괴상한 한 사람의 이야기로 넘겨 버리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합의화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언어 사용자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언어에 앞서서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에 그렇게 된다.
“한국사람들은 개 같아요.”
한국말을 배우는 어떤 일본인의 실수담이다. 일본사람들은 고양이 같이 조심스럽고 조용한데, 한국사람들은 개 같이 활기차고 활발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이 말을 들은 한국사람들의 기분이 썩 좋지 못했음은 한국인이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문디 가스나가!”
경상도 사람들의 친근감 표현에 서울사람들은 내가 뭘 잘못했나 깊이 고민한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의사소통 부재로 고립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예담에서 출판된 페터 빅셀의 단편집 “책상은 책상이다.”에는, 앞서 말한 “책상은 책상이다.”를 포함하여 총 7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103페이지의 가벼운 책이지만, 내용의 무게는 묵직하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지구가 둥근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부터 앞으로 쭉, 일직선으로의 여행을 계획하는 남자. 애써 발명한 텔레비전이 이미 세상에 나와있어서 좌절한 어떤 발명가. 열차시간표를 모두 외웠기 때문에 열차를 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억력이 좋은 남자. 요도크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했던 남자. 아무 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중국어까지 배우게 된 남자.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뛰어난 기억력과, 엄청난 것을 발명할 수 있는 머리를 가졌지만 세상 속에서 고립되어 버렸다. 외롭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준다. 요도크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위해, 마음껏 요도크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가실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할아버지는 지겨울 정도로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잠시 현실에 눈감고 환상의 무대를 마음껏 펼쳐 준다. 그 뒤에 나타난 짧은 현실 이야기는 없어도 좋을 뻔 하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덧붙여 지면서 현실보다 환상에 더 큰 무게를 주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거짓말을 한 광대 콜롬빈에게도 작가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 그가 고립되는 일이 없도록,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콜롬빈의 장단에 맞추어 없는 마침내 없는 대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콜롬빈은 외롭다. 아메리카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력이 좋은 남자는 마침내 열차를 타게 되지만, 그가 열차 시간표를 외우고 있을 무렵에 열차를 타던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을까는 의문이다. 그래도 그는 새로운 알거리를 찾아 떠났으므로 외로움에서 조금은 해방되지 않았을까?
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에는 개개인의 관심사도 각각 다르고, 따라서 서로를 이해하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더욱 큰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이 책이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9.7.22. by waterai
책상은 책상이다 상세보기
페터 빅셀 지음 | 예담 펴냄
침대를 사진으로, 책상을 양탄자로, 의자를 시계로, 시계는 사진첩으로 부르기로. 이렇게 주위의 모든 사물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로 한 이 남자는 한동안 들뜬 마음으로 새로운 사물들의 이름을 외운다....